1977년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영화 《줄리아(Julia)》는 미국의 극작가 릴리언 헬먼(Lillian Hellman)의 회고록 『Pentimento』에 기반하여 제작된 감성 드라마로, 정치적 혼돈의 시대 속에서 두 여성의 진한 우정과 용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제인 폰다는 릴리언 헬먼 역을 맡아 내면의 불안과 사랑, 상실을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는 연기로 표현하며, 1970년대 여성 중심 영화의 전형을 세운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시 한 번 각인시켰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나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극이 아니라, 여성 간의 유대, 양심, 글쓰기의 윤리 등을 고요한 서정으로 풀어낸 영화입니다.
제인 폰다, 침묵 속 감정을 말하는 연기
제인 폰다가 연기한 릴리언 헬먼은 작가로서의 자의식, 연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혼란, 그리고 친구 줄리아에 대한 갈망이 뒤엉킨 복잡한 인물입니다. 릴리언은 세상과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줄리아에 대한 회상 속에서 그녀는 서서히 감정을 풀어내고 내면을 열어갑니다. 폰다는 과장 없는 연기 톤으로 릴리언의 조용한 고뇌를 표현하며, 강한 인상 없이도 묵직한 감정을 이끌어냅니다.
특히 영화 중반 줄리아를 돕기 위해 유럽을 방문하고, 줄리아의 요청대로 나치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돈을 운반하는 장면에서 제인 폰다는 행동과 시선, 호흡만으로 극한의 긴장감을 전달합니다. 릴리언은 본래 정치적 성향이 뚜렷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친구를 위한 연대와 인간적 의무감 속에서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이 과정을 폰다는 드라마틱하게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절제된 감정 속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그 의미를 곱씹게 만듭니다.
줄거리 요약: 삶과 죽음, 기억 속에서 이어지는 우정
영화는 릴리언 헬먼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시작됩니다. 그녀는 젊은 시절 줄리아라는 친구를 두고 있었고,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지만 여전히 깊은 유대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줄리아는 유럽에서 반나치 운동가로 활약하며 신변의 위험을 감수하는 인물입니다. 릴리언은 작가로서 미국에 머물며 창작의 어려움과 내면적 갈등에 시달립니다.
줄리아는 릴리언에게 편지를 보내 유럽으로 와달라고 요청하고, 릴리언은 뉴욕을 떠나 파리로 향하게 됩니다. 그녀는 베를린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줄리아가 지시한 대로 가방 속에 현금을 숨기고, 밀사와 접선하며 중요한 자금을 독일 반체제 인사에게 전달합니다. 이 일은 그녀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행동하는 양심’이 된 사건이며, 이후 줄리아는 실종되고, 결국 사망 소식이 전해집니다.
줄리아의 아이를 돌봐달라는 부탁도 헛된 것이 되어가며, 릴리언은 줄리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오스트리아 병원을 찾아가지만, 끝내 줄리아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영화는 릴리언이 줄리아를 기억하고 그녀에 대해 글을 쓰며 마무리됩니다. 줄리아는 릴리언의 글쓰기 안에서, 또 그녀의 감정 속에서 되살아나는 존재가 됩니다.
여성 서사, 그리고 미묘한 감정의 결
《줄리아》는 당시 헐리우드 주류 영화가 대부분 남성 중심으로 진행되던 흐름 속에서, 두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극을 이끌어나간 독보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릴리언과 줄리아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 그 이상으로, 동경과 사랑, 존경과 연민이 혼합된 감정 복합체입니다. 제인 폰다는 릴리언이 줄리아에게 느끼는 감정을 한 단어로 정의하지 않고, 미묘한 시선과 말의 여백으로 표현해냅니다.
특히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연기한 줄리아와의 장면들은 짧지만 강렬합니다. 두 여성이 비밀스럽고 조용한 장소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순간, 이 영화의 정서적 정점이 완성됩니다. 줄리아는 용기의 아이콘이지만, 릴리언은 삶과 글쓰기 속에서 그것을 다시 해석하고자 하는 인물입니다. 이 둘의 차이와 균형은 이 영화가 단순한 전기영화나 정치영화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기억을 중심에 둔 드라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미장센과 회상의 구조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릴리언의 회상 속에서 줄리아와의 시간들을 엿보게 만듭니다. 회상이라는 장치를 통해 현실과 기억이 교차하며, 감정이 진폭을 더합니다. 색조는 전체적으로 무채색에 가깝고, 카메라 움직임은 최소화되어 있어 관객이 인물의 감정 변화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와 함께 음악 또한 절제되어 있어, 상황의 감정선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배경으로 흐릅니다. 실내 촬영이 많은 가운데, 유럽 도시의 거리와 호텔 내부, 열차 칸 등 제한된 공간이 만들어내는 밀도 있는 긴장감은 관객을 극에 몰입하게 만듭니다. 줄리아와 릴리언이 나누는 짧은 대사와 눈빛의 교차는 이 영화의 ‘감정적 액션’이라 할 수 있으며, 폰다의 연기는 이 모든 것을 고요하게 이끌어냅니다.
결론: 기억을 살아있게 만드는 글쓰기, 그리고 감정
《줄리아》는 외적으로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한 여성의 성장기이자 감정의 기록입니다. 줄리아를 향한 릴리언의 감정은 단순히 ‘그리움’으로는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죄책감, 미안함, 상실, 그리고 글을 통해 다시 살아나게 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인 폰다는 이러한 감정의 결을 반복과 침묵, 표정의 굴곡을 통해 깊이 있게 표현해냈고,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를 만큼 찬사를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줄리아》는 여전히 유효한 영화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살아있게 만드는 방식으로서 ‘기억의 윤리’와 ‘글쓰기의 책임’을 되새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성 인물들만으로 깊은 감정과 극적 구조를 이끌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도 강력한 메시지를 갖는 영화입니다. 제인 폰다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섬세한 연기를 느끼고 싶은 관객이라면 반드시 감상해볼 가치가 있습니다.